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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은 환자가 필요한 곳으로"…대전을지대병원의 40년 뚝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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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2020.04.22
  • 조회수5948

100세 시대를 맞아 의료 접근성 개선에 목말라하는 지역이 늘고 있다. 이번 4·15 총선은 코로나19 이슈로 인해 후보자들의 지역 공약이 크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형 병원 유치를 공약으로 내건 후보자가 여전히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대형 병원 유치가 그만큼 어렵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런데 1980년대에 병원 스스로 의료 취약 지역을 찾아가 지역 친화 병원으로 깊게 뿌리내린 사례가 있어 주목된다.

 

 

1981년 4월 23일 수도권에서나 볼 법한 최신식 대형 병원이 대전에 들어선 것이다. 대전시 중구 목동에 지하 1층~지상 6층 규모로 총 17개 진료과에 218개 병상을 갖추고 개원한 대전을지병원(현 대전을지대학교병원)이다. 1970년대 후반 당시 병원계 이슈는 단연 `강남 개발`이었다. 서울 지역의 인구 분산 정책에 강남이 신시가지로 부상함에 따라 교통의 요지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 결과 강남 지역이 급속도로 유동인구를 흡수하면서 강북 지역에 밀집됐던 대형 종합병원이 서서히 경영압박에 몰리게 됐다. 각 병원들은 자구책으로 신도시 강남을 1순위로 꼽아 너도나도 제2 병원 건립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런 시기에 을지는 강남 대신 대전에 병원을 세운 것이다.

대전을지병원 개원 멤버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주명숙 간호사(현 대외협력이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 시민들의 기대가 대단했어요. 대전에도 서울에 가서나 볼 수 있는 최신식의 큰 병원이 생긴다고 해서요. 사람들이 모이면 목동에 큰 병원이 생긴다더라, 서울에서 유명한 산부인과 의료재단이 대전에 병원을 짓는다더라, 이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나요."

 

◆ 수익 대신 환자가 기다리는 곳으로

사실 시대 흐름에 따라 강남으로 진출한다면 곧이어 수익이 따라오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나 마찬가지였다. 신도시 개발에 따른 입지 조건과 소득 수준이 높은 부유층의 강남 쏠림 현상이 이 같은 정황을 대변하고 있었다. 반면 이 시절 대전시는 인구가 100만명도 채 안 되던 곳이었다. 대형 병원이 자리하기에는 상주인구가 부족한 곳이어서 좋은 병원과 의료시설은 턱없이 적었다.

아직 개발이 미흡한 상황에서 도시의 발전 가능성만 믿고 나서기에는 병원 운영에 모험을 걸어야 했다. 당연히 선뜻 이곳에 병원을 세우려는 대형 병원은 없었다. 을지재단 내부적으로도 대전 지역에 병원을 세우는 것은 무리수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고(故) 범석 박영하 박사(을지재단 설립자)의 생각은 달랐다. 박준영 을지재단 회장은 "`병원이 잘되는 곳이 아니라 환자가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게 박영하 설립자의 신념이었다"면서 "그것이 을지를 강남 진출이 아닌 대전으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서울 을지로에 있던 을지병원이 대전을지병원 개원에 필요한 토지와 건물, 의료기기 등 막대한 건립 자금 전액을 충당했다. 이렇게 탄생한 대전을지병원은 대형 종합병원만이 할 수 있는 높은 의료 수준을 제공하며 대전 지역의 의료 서비스 향상을 이끌었다.

이는 질 높은 의료에 목말라 있던 지역 주민들에게는 단비와도 같았다. 대전을지병원은 시설이나 규모는 물론이고 의료장비를 들여놓는 일에도 더 나은 수준으로, 더 새로운 것으로 공을 들였다. 또 지역을 막론하고 우수한 의료진을 수소문했으며 서울을지병원에서도 의료진을 파견했다.

1985년 설립된 충북대 의대 학생들이 부속병원이 없어 멀리 실습하러 오던 곳도 바로 이 병원이었다. 당시 충청 지역 의료 현실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또 대전을지병원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 대전 최초 사립 의대 설립

병원이 차츰 성장해 여유를 찾게 될 무렵 대전을지병원은 지역사회에 의미 있는 도전을 추진하게 된다. 바로 의대 설립이다. 박준영 회장은 "대학 설립은 재단의 최대 숙원 사업이기도 했지만 의대라곤 국립대 한 곳뿐이던 대전 지역에서 우수한 보건의료 인력을 양성하는 일은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다"고 설명했다.

결국 을지재단은 수차례 도전을 거듭한 끝에 1997년 을지의과대학을 설립했다. 대전에도 최초로 사립 의과대학이 생겨난 것이다. 이때 을지의대와 함께 설립인가된 전국 의대 4곳 가운데 대형 종합병원을 지어 지역사회에 공헌한 곳은 을지의대뿐이었다. 이후 박영하 설립자와 박준영 회장은 사재 422억원을 재단 내 학교와 병원에 기부했다. 특히 이 가운데 172억원은 박준영 회장을 비롯한 유가족이 박영하 설립자가 남기고 간 상속재산 전액을 기부한 것이다. 6·25전쟁 때 군의관으로 평양 탈환 작전에 참가했고 의학 발전과 사회봉사 등을 통해 국가사회에 공헌해온 박영하 설립자는 2013년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 안장됐다.

지역에서 의사와 간호사 등 더 많은 보건의료 인력을 배출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을지병원도 대학병원 체제로 모습을 바꿨다. 명칭도 을지대학병원으로 변경했다. 1981년 이후 15년 만의 변화였다. 교수 신분의 의사들이 생겨났고 이 과정에서 서울대 등 국내 유명 의대 출신 교수가 대거 영입됐다.

전공의 수련을 통한 인재 양성에도 공을 들였다. 을지재단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박산부인과의원`은 1965년 서울대 산부인과교실이 전공의 파견을 수락한 병원이다. 종합병원으로 성장한 이후로도 교육·수련 분야에서 명성을 얻어 `을지 출신`이라는 프리미엄이 붙었다. 대전을지대병원은 현재까지 1500여 명의 인턴과 레지던트를 배출했고 이들 가운데 1000여 명이 지역 개원의로 활약하고 있다.

 

◆ "의료취약층 돕자" 병원 예산 2% 지역봉사에 써

2004년 대전을지대병원은 또 한 번 도전했고 큰 변화를 꾀했다. 대전의 행정과 경제·문화·교통 중심지인 둔산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지하 3층~지상 16층 연면적 9만9000여 ㎡(3만여 평)에 총 1053개 병상을 갖추고 문을 열었다. 중부권 최대 병원이자 최고의 대학병원이었다. 당시 서울시 노원구 하계동의 의료법인 을지병원(현 노원을지대병원)은 을지의대 설립과 둔산병원 건립 자금의 70% 이상에 해당하는 총 662억원을 무상으로 기부했다. 이때 을지병원이 해당 건립 자금을 대전병원에 무상 기부하지 않고 다른 법인처럼 차입 형식으로 자금을 지원했다면 현재 대전을지대병원은 그 원금 1084억원과 이자비용 927억원 등 총 2011억원을 갚아야 하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둔산시대` 개막과 함께 대전을지대병원은 대전·충청 지역은 물론 수도권 외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각종 암 진단 장비를 도입하며 본격적으로 암 진단에서 치료에 이르는 암 치료 첨단 시스템을 착실히 구축해 나갔다. 특히 2009년 중부권 최초로 로봇수술 장비인 `다빈치-SHD`를 도입했다. 당시 국내에 단 2대뿐이던 이 첨단 장비는 대장암과 전립선암 등 각종 암 수술에 있어 인간 손의 한계를 뛰어넘는 정교한 수술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김하용 대전을지대병원장은 "의료장비 하나를 사더라도, 임상교수를 모셔올 때도 남들이 망설일 때 언제나 앞장서 먼저 시도하고 도전해왔고 이런 것들이 결국 지역 의료계 전체 수준을 끌어올렸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대전을지대병원은 나눔을 실천하는 일에 앞장서 왔다. 개원 당시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지역의 무의촌과 농어촌, 도시 영세민 등 의료 취약 계층을 순회하며 무료 진료를 실시해 왔다. 그 하나로 1994년 의사와 간호사 등 60여 명으로 창단한 `을지의료봉사단`은 무의탁 노인, 소년·소녀가장 등 불우 이웃에 대한 무료 진료와 수술, 간병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도움의 손길을 펼쳤다. 당시 병원 예산의 2%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을 들였고 이는 오래도록 의료계 전체의 귀감이 됐다.

나눔은 해외로도 이어졌다. 2008년 을지대의료원 의료진과 을지대 학생으로 구성된 을지한마음봉사단을 창단한 이후 해마다 몽골, 라오스, 필리핀, 베트남 등에서 선천성 심장병, 구순·구개열 환아 무료 수술을 실시하는 등 의료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 지역 넘어 글로벌 시장 진입까지

을지는 또 한 번의 도전을 감행했다. 글로벌 시장 진입이다. 2016년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의 하나인 방글라데시 제1국립의과대학(이하 BSMMU) 부속병원 건립에 을지대가 주관사로 최종 확정됐다. 대전을지대병원은 BSMMU 의료진·직원 등에 대해 포괄적인 국내외 초청과 파견 교육을 실시하게 됐다.

 

 

기존 ODA 사업은 저개발 국가에 단순히 병원을 지어주는 것에 국한됐지만, 이번 사업은 의료 기술과 병원 경영 노하우까지 전수한다는 점에서 이른바 `한국형 의료 서비스`의 해외 진출 신호탄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대전을지대병원이 갖고 있는 `지역 대표 의료기관`이란 위상은 이렇듯 지역과 함께 성장하며 새로운 분야에 끊임없이 도전해온 데서 비롯됐다.

대전과 경기도 성남에 캠퍼스를 둔 을지대와 대전·노원을지대병원 등의 산하기관을 가진 을지재단은 올해 11월 경기도 의정부에 또 하나의 을지대병원과 캠퍼스 준공을 준비하고 있다. 2021년 3월에는 의정부을지대병원과 캠퍼스가 개원·개교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