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북부권 의료 허브 추진
박준영 을지재단 회장
6·25전쟁은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비극으로 꼽힌다. 한국 사회에 동족상잔과 이산가족의 아픔, 절대 빈곤과 같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전쟁은 전시 상황을 몸소 겪은 의사의 삶과 그들의 의술에도 깊은 흔적을 남긴다.
을지재단 설립자인 고(故) 박영하 박사는 6·25 의료 현장 한복판에 서 있던 인물이다. 1950년 서울대 의대 졸업 후 서울대 의대 산부인과학 교실에서 근무할 당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박영하 박사는 전쟁이 터지자 바로 자원입대했다. 민간의사 신분으로 야전병원에 배치돼 부상병을 치료했다. 포화 상태인 병원 주변에 커다란 텐트나 천막을 쳐 간이 입원실을 만들어 부상병을 돌보기도 했다. 설립자의 아들 박준영(61·산부인과 전문의) 을지재단 회장은 “이후 선친은 육군 군의관 1기생으로 지원해 야전병원 외과 부장을 지냈다”며 “병원 안에 24시간 머물며 생사를 넘나드는 부상병을 치료하고 수술하는 일을 계속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수원, 대전, 부산 기장 등 야전병원 최전선을 두루 돌며 병사 치료에 전념했다.
박영하 박사와 부부의 연을 맺은 을지재단 전증희 명예회장도 간호장교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의료인이다. 박 회장은 “전쟁 통에 군의관과 간호장교로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며 “의료인 부부가 모두 한국전쟁에 참전한 경력은 국내 의료계를 통틀어도 손꼽히는 일”이라고 했다.
전장서 펼친 인술 대물림해 환자 사랑 실천
박영하 박사는 젊은 의사 신분으로 전쟁에 뛰어들어 수많은 수술을 담당하며 의술을 펼쳤다. 부지기수로 죽어가는 목숨을 돌보며 의사로서 가져야 할 책임감과 생명의 존엄성도 체득했다. “선친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아픈 환자를 그대로 두고 나올 수 없어 3년을 더 복무했어요. 군대에서 깨달은 ‘의사는 환자 곁에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족이나 후학들에게 항상 강조하셨죠.”
한국전쟁 이후 의료 분야는 눈에 띄는 변화를 맞았다. 사회적으로도 보건위생 개념이 확립되면서 산부인과에 대한 인식도 확 바뀌었다. 가정에서 출산하던 풍토는 점차 사라지고 병원에서 분만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중령으로 예편한 박영하 박사가 개원한 박산부인과의원에도 환자가 몰렸다. 자궁외임신, 복막 출혈 등 응급 상황이 숱한 분만 현장에서 빠른 판단과 능숙한 조치로 환자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 결과 56년 2층 건물에서 단출하게 시작한 산부인과의원은 67년 종합병원으로 승격했다. 이때 을지병원으로 개칭하면서 지금의 을지대병원의 초석이 됐다. 박 회장은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군인은 아니지만 의료인이자 교육자로서 공헌한 공로를 인정받아 의사 최초로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됐다”고 전했다.
설립자의 호국 정신과 환자 사랑 이념은 오늘날 을지재단 의료·교육 사업의 근간을 이룬다. 병원 부지만 해도 그렇다. 보통 병원을 세울 땐 유리한 입지 조건을 먼저 따지지만, 을지대병원은 달랐다. 70~80년대 종합병원의 서울 강남 진출이 붐이던 시절엔 대전을, 서울에선 중심지가 아닌 상대적으로 의료 취약지였던 노원구를 새 병원 부지로 낙점했다. “서울 중심지나 신도시에 왜 병원을 짓지 않느냐며 의아해하는 이가 많았어요. 을지재단은 ‘환자 곁을 떠나지 않고 제 본분을 다하면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설립자의 가르침을 따랐고, 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60년 역사가 증명했죠.”
“병원은 환자 필요한 곳에” 설립자 뜻 따라
이런 을지재단이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일대에 지하 5층, 지상 15층 규모의 대학병원을 건립 중이다. 경기 북부권 최대의 종합병원이 될 전망이다. 의정부시 금오동 439-38번지 일원은 2007년까지 미군기지 캠프 에세이욘이 있던 곳이다. 을지대 부속병원·캠퍼스 건립은 미군 반환 공여지에서 이뤄지는 대규모 민간 투자 사업의 첫 사례로 평가받는다. 첨단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인재 양성과 지역 발전이란 측면에서 견인차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의정부에 병원을 짓게 된 계기는 뭔가.
“의정부시는 군사 도시 이미지를 탈피해 발전하고 있긴 하나 여전히 다른 수도권 도시와 비교해 의료·교육·문화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편이다. 처음에는 다른 후보지를 고려했지만 ‘병원이 잘 되는 곳이 아니라 환자가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설립자의 뜻에 따라 의정부에 병원을 세우게 됐다. 반세기 넘게 국가 안보를 지켜오던 땅이 국민 건강과 교육을 약속하는 새로운 거점으로 변모하는 것을 지켜봐 달라.”
-어떤 병원으로 만들 계획인가.
“지난 60여 년간 군사 도시로 기능하느라 여러모로 희생한 의정부와 경기 북부 지역 주민에게 수준 높은 의료 혜택을 제공하려고 한다. 소아 질환부터 노인 질환, 만성질환부터 중증 질환까지 모두 치료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계획이다. 치료의 ‘종착역 병원’으로 거듭나 진정한 지역민의 건강 돌보미 역할을 해내겠다.”
-공들이고 있는 병원 시설이 있나.
“새 병원엔 각종 편의시설은 기본이고 헬스장·수영장·마켓 등 차별화된 부대시설을 제공할 예정이다. 이제는 감염병 대비가 중요한 시대다. 새 병원엔 감염병 예방 시설을 강화해 의정부, 경기 북부 주민을 위한 건강 안보에 힘쓸 것이다. 옥상이나 대운동장의 헬리포트 시설, 의료진 관사, 게스트하우스 등 부대와 산이 많은 이 지역 응급환자를 위한 시설을 마련할 예정이다.”
-구성원들과 공유하고 싶은 게 있다면.
“병원은 누구 하나의 실력이나 노력만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다. 의사와 간호사, 행정직원, 영양사, 미화원 등 환자를 위해 희생·봉사하는 모든 직원의 협력 속에서 운영된다. 이런 팀워크가 유기적으로 이뤄지는 게 가장 중요하다. 이를 위해 직원이 만족하는 일터, 보다 쾌적한 업무 환경을 조성하는 데 힘쓰겠다.”
현재 의정부 을지대 병원·캠퍼스 공정률은 80%를 넘겼다. 외벽에 설치했던 마지막 공사 구조물인 건축용 엘리베이터도 철거하고 인테리어와 장비 도입 절차가 한창이다. 오는 11월 준공과 동시에 시범 운영을 계획 중이다. 박 회장은 “생각지도 못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해 병원 건립에 어려움이 적지 않다”며 “그럼에도 호국·안보 도시인 의정부 지역 주민을 위한 선진 의료 터전을 닦는다는 생각으로 내년 개원까지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고 말했다.